본문 바로가기

자연이 시를 품는다[1]

(144)
번데기 번데기 完 수윤 설날 아침, 손주들이 세배를 한다 어제까지 없던 나무들이 순식간에 쭉쭉 요술 방망이처럼 들어선다 그 나무들 속 할미와 나는 숲 속의 작은 오두막 같은데 오냐, 건강해야지. 올해는 꼭 1등 하지 않아도 된다 어리둥절한 성민이를 보며 1등은 늘 쫓기잖니, 그래서 항상 피곤하단다 제 어미를 쳐다보는 입가에 묘한 주름이 잡힌다 덩치야 제 아비만 하다만 아직은 비린내 가시지 않은 번데기 1단계, 먹을 걸 구걸하고 화초들 물 챙겨야 하는 지들 아비는 2단계 그것마저 벗어버린 홀가분한 경지 3단계인 나는 주름 속의 주름 겹치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을 일 없고 쪽팔림에 목숨 걸 이유야 더더욱 없지만 아웅다웅 우거지 같았던 지난 삶의 주름도 지나고 보면 찻잔 속 태풍 이었다나? 어쨌다나? ㅡ 2020..
무게 실수[무게] 完 수윤 돌부리에 차이면 아프지 솟구친 지구를 안으면 헛웃음이 나오지 나도 많이 아프단다 다만 안 아픈 척할 뿐 아비보단 너희들의 상처가 더 속상하지 혼자 밤길 걸을 땐 나 역시 두렵고 무섭단다 오징어 먹물 같은 어둠에 갇히고 빛이 보이지 않을 때 팔을 휘저어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을 때 한 발 앞이 절벽인지 모르지만 그래도 가야 할 때, 차라리 나도 그 자리에 돌부리로 얼어붙고 싶은 적 한두 번이 아니지 지금 이 순간은 생전 처음이지 너희가 처음이듯 아비에게도 지금 바로 이 순간은 처음이란다 그 두렵고 외로운 첫 길을 걷다 보면 아비도 실수할 수 있을 거다 너희들이 돌부리에 넘어지고 무릎 까지듯이 아비도 엎어지고 깨질 수 있는 거란다 넘어지고 실수하는 건 똑같은데 왜 아비는 더 아프지 그건 ..
불후의 명작을 위하여 불후의 명작을 위하여 ㅡ 아카데미 동창회 20주년에 즈음하여 ㅡ 우린, 우리를 조기축구회라 부르기로 했다 한 팀도 채 안 되던 팀원들이 두 팀, 세 팀 그렇게 우린 스물한 팀이 되었다 축구화 아닌 맨발로 돌머리를 공처럼 굴리고 굴려서 노트 운동장을 뛰어 다녔다 그 작은 발길이 모여 선후배들이 모여 넘어지고 깨지던 헛발질이 모여 노벨상은 우리에겐 조기축구회로 출전하는 월드컵과 같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지만 조금 찰 줄 안다는 것은 좋아하는 공차기를 이길 수 없듯이 좋아서 하는 글쓰기도 즐기는 자에겐 당하지 못한다는 걸. 교과서엔 실리지 않아도 좋다 다만 내가 쓸 수 있는 최고의 시 하나, 수필 하나, 소설 한 편이 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불후의 명작이 되고도 남을 오직 그 하나를 위하여. 아카데미여, 영원하..
하늘 동창회 하고 있을 친구들아 하늘 동창회 하고 있을 친구들아 ㅡ세잔 尹 完洙 ㅡ 강구항엔 배부터 띄워 둘라네 그리웠던 순간들 호명하며 나는 환하게 불 밝힐라네 오늘은 천상에서도 동창회 열고 있을테지 우리는 한 명씩 줄어들고 하늘 회원은 자꾸 늘어나리니 인원 적다고 채근들 마시게나 이 사람들아! 하늘에 ..
소소원[昭笑園] 소소원[昭笑園] 完 수윤 그늘진 물빛마다 하늘 덧칠하는 계절 느티 의자가 있는 포항 청하면 유계리 안심지 기가 막히게 이뻐 어쩜 돌고래 한 마리 살고 있을지 모르지 잘게 썬 비빔채에 곧잘 업혀나오는 날치알과 자야 궁디만한 파전, 저수지 통걸로 차려내는 집 정작, 오죽烏竹 뒤집어 쓴 칡즙이 제 털색인지도 모른 채 깜치는 죽자사자 내 운동화만 물어 뜯는다 그러고 보니 너도 그 비빔채에 고기 한 줌 빠진 걸 알고 있구나 인동초 나팔 소리가 땍땍거리는 소소원의 오후 평상을 빠져나온 자야 끌어 당기는 안심지 햇살 볶아대는데 애기 젖물리다 말고 제 먼저 잠밭 헤매던 새댁은 꿈길에서도 앞산 오르는 산그림자 끌어내리는 중이다. ㅡ 20140608 ㅡ 完 ! 세잔 * 2014 아람 가을호 발표
낙엽 지거든 물어보세나 낙엽 지거든 물어보세나 ㅡ 세잔 尹完洙 ㅡ 자네도 왔구먼 춘화야, 우짜자고 자꾸 젊어지노, 뭐 좋은 일 있나? 동호야, 아프다카디 요새 건강은 어떻노? 이젠 한손으론 움켜쥘 수도 없는 나이 우리 예순하고 넷이지, 좋다는 거 다 붙들어 둘 수야 없다 등 따습고 배부르면 그기 최고인기라 ..
봄날 봄날 ㅡ 세잔 尹 完洙 ㅡ 차 한 잔 가져다 놓고 나간다 한참 뒤, 핼쑥해진 찻잔을 다시 거두며 굴속에 오래 처박혀 창백한 내게 혀를 끌끌 찬다 어이구, 이 양반아! 돈도 안 되는 거, 다 저녁답에, 고마 설렁설렁 살다 가시더 구렁이 담 넘어가듯 귓등에다 걸치고 창가에 장승처럼 섰다 벚꽃..
엄마, 아빠니까 엄마, 아빠니까 / 시 & 完 울타리콩 덩달아 눈길 쫓느라 바쁘다 폴짝폴짝 그루터기에 앉은 내 머릴 쓰다듬는 바람은 뭔가 알아챈 것 같다 할아버지, 소나무가 왜 자꾸자꾸 많아요? 그건 바람이 많아서란다 할아버지 머리에서 바람 소리가 나요 봄이 오는가 싶었는데 눈 깜박할 사이 여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