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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사각의) 사랑법 사각의 방完 수윤 줄을 타는 게 본업이지, 내친김에 집을 지을 뿐모롱이 돌아가는 지붕귀 처마 아래작고 초라한 집을 짓는다어제 쓸려간 집은 제법 쏠쏠했는데배곯진 않았는데평생 집 한 채 갖겠다는 소원을 이룬 건물 주인이 휘두르는 빗자루 춤만 빼면 수라에선 새끼, 어미, 갓 태어난 새끼를 문밖에 버리며백석 가슴이 미어졌다는데 내가 이 명당을 차지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목숨을 걸었기 때문 고층 외벽에 줄을 내리고 페인팅하는 집주인이나 꽁무니에 줄 하나 매단 나나 행여, 줄의 긴장에 무관심하거나 방심하거나먹고 남은 찌꺼기에 줄이 매달린 날은 빗질 쓰나미까지 각오해야 한다 오늘이라도 주인이 장기 출장을 가는 요행을 바라며 로또복권을 사듯 줄을 탄다 ㅡ 20231202 ㅡ ..
겨울 아침 겨울 아침 完 수윤공원을 한 바퀴 걷네마른 나뭇잎들이 오도카니 떨고 있네길고양이 한 마리음식 쓰레기통 속에 매달려 있네먹을 것은 한 입도 없고바람만 찬데집을 나왔으나 마땅히 갈 곳을 찾지 못한 내가마른 낙엽더미에길고양이처럼 앉아있네 --20231129 -- 완
폐가 폐가 完 수윤 풀밭에 의자 하나 놓였다 누군가 끌고 왔을 긴 생이 녹슨 양철 지붕처럼 인쇄된 의자의 한뉘 숱한 생각들이 앉았다 간 자리에 풀들은 손을 뻗어 조심스레 쓰다듬는데 유난히 긴 팔을 가진 새콩이 끌어안자 삐걱, 관절 소리가 빠져나온다 뻔질난 바람의 유혹과 잠시 맡기고 뒹굴었을 편안의 무게를 의자는 기억하고 있을 테지 이젠 버려진 그 마음조차 포근해오는지 뒤란은 어때 풀밭이면 또 어때 마치 풀밭이 낳아놓은 알처럼 의자는 한사코 넝쿨 속으로 파고든다 다리를 잡고 오르는, 칭칭 감는, 점점 한 몸이 되어가는 넝쿨 의자가 사는 집 소 헐떡이는 소리 한때 쟁기 돌 치는 소리 요란했을 텃밭도 인적 끊어진 지 오래다 ㅡ 20201109 ㅡ 完
번데기 번데기 完 수윤 설날 아침, 손주들이 세배를 한다 어제까지 없던 나무들이 순식간에 쭉쭉 요술 방망이처럼 들어선다 그 나무들 속 할미와 나는 숲 속의 작은 오두막 같은데 오냐, 건강해야지. 올해는 꼭 1등 하지 않아도 된다 어리둥절한 성민이를 보며 1등은 늘 쫓기잖니, 그래서 항상 피곤하단다 제 어미를 쳐다보는 입가에 묘한 주름이 잡힌다 덩치야 제 아비만 하다만 아직은 비린내 가시지 않은 번데기 1단계, 먹을 걸 구걸하고 화초들 물 챙겨야 하는 지들 아비는 2단계 그것마저 벗어버린 홀가분한 경지 3단계인 나는 주름 속의 주름 겹치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을 일 없고 쪽팔림에 목숨 걸 이유야 더더욱 없지만 아웅다웅 우거지 같았던 지난 삶의 주름도 지나고 보면 찻잔 속 태풍 이었다나? 어쨌다나? ㅡ 2020..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完 수윤 동살이 눈 비비는 새벽 6시 오르락내리락 4층에서 1층, 시장, 떡방앗간까지 흐느적이는 501호 자야 할머니는 명절이면 낡은 지느러미로 퍼덕이는데 지팡이보다 맘이 더 바쁜데 이번 설에는 이번 설날에는 할머니하고 헤엄쳐 올 작은 부레들이 삼삼해 차 소리마다 귀를 내거는데, 하마나 하마나 차례 지낸 음식 들고 벨을 누르자 끼이~익 어제보다 더 무거워진 문 혼술 홀짝이는 할머니보다 더 늙어버린 씁쓸이 먼저 뛰쳐나온다 이럴 땐 뭐라고 하지? 괜스레 짧은 내 가방끈만 탓하다가 겨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ㅡ 20200127 ㅡ 完! 세잔
무게 실수[무게] 完 수윤 돌부리에 차이면 아프지 솟구친 지구를 안으면 헛웃음이 나오지 나도 많이 아프단다 다만 안 아픈 척할 뿐 아비보단 너희들의 상처가 더 속상하지 혼자 밤길 걸을 땐 나 역시 두렵고 무섭단다 오징어 먹물 같은 어둠에 갇히고 빛이 보이지 않을 때 팔을 휘저어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을 때 한 발 앞이 절벽인지 모르지만 그래도 가야 할 때, 차라리 나도 그 자리에 돌부리로 얼어붙고 싶은 적 한두 번이 아니지 지금 이 순간은 생전 처음이지 너희가 처음이듯 아비에게도 지금 바로 이 순간은 처음이란다 그 두렵고 외로운 첫 길을 걷다 보면 아비도 실수할 수 있을 거다 너희들이 돌부리에 넘어지고 무릎 까지듯이 아비도 엎어지고 깨질 수 있는 거란다 넘어지고 실수하는 건 똑같은데 왜 아비는 더 아프지 그건 ..
이월 이월 完 수윤 초원 아파트 담벼락 틈새로 꽃대 세우는 늦겨울과 초봄 사이 냉이꽃 하나 허락도 없이 꽃대 올린다 놀란 햇살이 녹지근하게 군불 지펴주고 경계 풀린 길고양이 한 마리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햇살보다 더 달달한 하품 꽃 피우네 덩달아 냉이꽃도 가늘고 긴 향수병 하나 발밑에 감추고. 20190314 完 세잔
물소리경 물소리경 完 수윤 식탁에 밥풀떼기 같은 꽃잎들이 둘러앉자 그녀의 미소가 살아났다 그릇에 담긴 음식을 하나도 남김없이 싹싹 비웠을 때 그녀는 풍경소리를 냈다 숨탄것들은 저마다 하나씩 무늬를 가지는 것이라고 햇살이 차려진 식탁에서 다듬고 썰고 지지고 볶으며 그녀는 손등에 새겨진 무늬를 자랑스러워했다 그게 문신인 줄 모르고, 그게 수행인 줄도 모르는 밀대질을 하고 쿠쿠를 깨우는 그녀는 물소리에 經이 쌓인다 식구들을 담아내고 재우던 지붕 아래 큰 그릇도 그녀의 그릇보단 크지 않아서 물소리를 비워내고, 새벽을 비우고, 또 하루를 비워야 하는 물의 수행법 그녀는 그릇 속에서 물소리를 깨우치고 있었다. ㅡ 20190624 ㅡ 完 ! 세잔 * 물소리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