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노트에 베끼고 싶은 詩

달빛 사용 설명서



달빛 사용 설명서 / 홍일표
       희귀종이 되어 멸종 위기에 처한 달빛은 
      머잖아 박물관 한 구석에 처박히거나
      고서의 한 모퉁이에서 잔명을 이어갈 것이다
      함부로 달빛 한 점 건드리지 마라
      주의사항을 숙지하지 않으면
      삽시간에 휘발할 것이다
      여간해선 달빛 한 올 발굴할 수 없지만
      용케 찾아낸 달빛은 쉽게 곁을 주지 않는다
      달빛의 내심을 의심하는 자가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극약 처방하듯
      시인의 손도 조심스럽다
      자칫 늙은 절집 처마나 비춘다고 뭇매를 맞거나
      한물간 음풍농월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조심하라
      그대 혼자 지리산 책갈피에 숨어들어
      백발 성성한 달빛 줄기를 읽어나가야 할 것이다
      어설피 달빛 대붓을 들고
      섬진강 모래밭에 끼적이지 마라
      절필한 지 오래된 달빛은 서서히
      뒤뜰 독 안에 여치 소리로 스며들거나
      한 대접 정화수에 몸을 풀고 잠적할 것이니
      조심하라
      그대의 몸은 이미 많이 야위었다
              『시안』(2008, 겨울)
      ..................
      찬란하게 맑은 것들은 그대로입니다. 구김이 없습니다
      스스로 다가가 안녕이란 안부를 전할때, 숲이며 풀이며 산이며 언덕이며 
      할배의 징듬짐 올개며
      조약돌 더미 하나까지 그의 친구입니다,
      부딛쳐 사각거리는 보이지 않는 순수의 파도
      순수의 이념은 세월이 지나도록 늙지 않습니다, 언제나 사랑때문입니다.
      사람들과 사는 세상, 사람들의 짓으로 이루어진다던 세상, 항상 그대로인데
      싫다 좋다 합니다
      군데군데 쉬임없이 헹구어주는 그대의 눈빛
      담아 놉니다, 마음 구석에 담아놉니다. 李旻影
      

'노트에 베끼고 싶은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 편 / 문정희  (0) 2009.12.18
선운사에서 / 최영미  (0) 2009.12.17
져야 할 때 질 줄도 알아야 해 / 김형수  (0) 2009.12.03
젊음을 지나와서 / 김형수  (0) 2009.12.01
부엌의 불빛 / 이준관  (0) 2009.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