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가죽이 벗겨진 자화상
이원
검은빛에 갇힌
길들. 제 스스로 몸을 구부려 돌아가고 있는 것
하루. 벽을 밀고 가는 것
한여름에 모포를 뒤집어쓰고 땀을 뻘뻘 흘리는 형국
물 빠진 뻘에 배가 여럿이다
바다 멀리까지 보인다
죽은 사람 산 사람 모두 여기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안이 들끓어 밖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안을 만들어내기 때문
다시는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난다 해도 나는 내가 사람인지조차 모를 것이다
사람은 날마다 거울을 통해 제 얼굴을 바라본다. 그 얼굴에 나타난 세월의 흔적과 자기의 상처와 더불어 타자의 욕망을 본다. 이 바라봄은 곧 성찰의 행위로 이어진다. 얼굴은 내가 처한 곤란함과 피로와 누추함을 드러낸다. ‘자화상’이란 들끓는 안이 뒤집혀 바깥이 되어 버린 풍경이다. “안이 들끓어 밖을 보지 못하는 것은 [끝없이] 안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란다. 나는 내 안을 드러내는 이 표면[얼굴]이 싫다. 그것에서 도망가고 싶다. “다시는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은 얼마나 서늘한가.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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