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 / 이기호
그분이 화가 난 채 나를 찾아오시면
왜 하필 나란 말인가 푸념하지 마라.
소주 한 됫병이라도 하고 온 것처럼
거들먹거리며 시비를 걸어오더라도
왜 다짜고짜 시비조냐고 는 묻지 마라.
오미자차를 보리차처럼 끓여서
꿀을 조금 넣은 꿀물이라도 따뜻하게 내올 일이다.
그분의 됨됨이 굳이 논할 필요까지 있을까?
가식도 없으며, 꾸밈도 없으신 분이시다.
태생이 앞뒤 구분 짓는 분이 아니므로
시각時刻도 구분 못 한 채 왜 손님처럼 찾아오느냐고
문전박대하지 말지어다. 살다가
행여, 그분이 찾아오시면 집안에서
가장 따뜻한 아랫목으로 정중히 모셔놓고
장가갈 때 준비한 원앙금침 포근히 깔아서
대추, 모과, 생강차로 줄줄이 봉양하고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으시고 열을 내시면
가까운 한의원에 들러서 십전대보탕이라도 끓여
정성을 다해 내올 일이다.
집안에 머무는 한 사흘 동안은
삼시(三時) 세 때 문안 꼭꼭 여쭈어 불편함은 없으신가.
친절히 안부 인사 꼭꼭 여쭙고
그 속을 헤아려 이해하고 정중히 받들어야 한다.
대접이 소홀하면 엉덩이가 더욱 무거워지는 분이시니
떠나시기 전까지는 마음으로 모셔 볼 일이다.
ㅡ 10110108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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